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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2. 2. 15:20 - 제도샤프

색약 포토그래퍼의 사진보정 적응기


'단언컨대, 본다는 것은 가장 큰 축복입니다' 를 기억하시나요. 헬렌켈러의 자서전에 나왔던 말로, 우리나라에서는 팬택 베가넘버6의 광고 카피로 사용되어 인기를 끌었지요. 여기에 한마디만 더 추가할 수 있다면,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이는 그대로, 색상표에 나온 그대로 색을 받아들이고, 인지하고, 또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인 것 같습니다. 본다는 것에서 감을 잡으셨는지요. 오늘은 제 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 바꿀 수 없는, 신체의 한계로 인해 어렸을 때의 꿈을 접어야 했던, 그리고 지금의 사진활동을 방해하고 있는 그런 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 눈은 종합병원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화려한 이력을 자랑합니다. 일단 심하진 않지만 요즘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근시가 디폴트 옵션으로 장착되어 있습니다. 둘째로, 심한 난시도 포함되어있지요. 셋째로, 굴절율이 꽤 높은(?) 외사시까지 있습니다. 어렸을때 외사시 수술을 하다가 수술실 안에서 마취가 풀린 정신나간 일도 한번 있었는데 시간이 오래 지나서 그때 수술해서 교정한 실밥이 모두 풀려 다시 재수술을 해야 할 지경까지 가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전국민의 5.9%가 가지고 있다는 색약, 그중 다수를 차지한다는 제 2 색약 (적녹색약)까지 있습니다. 정도가 심하냐 하면... 심합니다. 




두 이미지를 구별하실 수 있으신가요? 

전 못합니다.


저도 제가 어떻게 보는지 여러분들께 설명을 드리고 싶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저도 빨간색과 초록색, 파란색, 하여튼 구별은 다 됩니다. 떡볶이가 빨간색이고 소화전이 빨간색이라는 것도 압니다. 산이 초록색이라는 것도 압니다. 바다는 파랗지요. 이해하기 힘드시겠지만 그렇게 개별적인 색을 두고 이야기하면 구별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저는 위 사진들의 차이점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좌측과 우측의 이미지가 그냥 똑같아보입니다. 저게 적색인지 녹색인지 그건 확실하게 모르겠고, 그냥 빨간 계열의 색상이고 초록 계열의 색상이라는 것 정도로만 보입니다. (우측 신호등 아래 빛은 흰색이라면서요?) 정상인들이 보는 시선으로 세상을 한번도 본 적이 없기에 여러분들이 보는 빨강은 어떤 느낌인지, 여러분들이 보는 초록은 어떤 느낌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제가 보는 세상과 여러분이 보는 세상이 어떻게 다른지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사실 적색과 녹색만 문제가 되면 괜찮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색깔은 서로 섞여서 만들어져서 그런가 적녹색약이라 하더라도 색 밸런스는 전체적으로 영향을 받는 모양입니다. 어렸을때 주로 강조할 때 사용하는 빨간펜이 잘 안보여 핵심적인 내용에는 파란펜을 주로 사용했고, 미술시간에 돌출색이라고 배우는 빨강보다 녹색이 더 도드라져 보였습니다. 또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태블릿으로 그림들 따라서 모작하는 연습을 했는데, 색칠해놓고 보면 "사람 살색이 왜 풀밭이냐" 혹은 "아바타에 나오는 사람들같다"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만, 색약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중학교때 미술 시간에 색조를 배우면서 이해도가 개판이었던게 당시에는 그냥 제가 인지능력이 떨어지는건가 생각했지만 제가 색약이었기 때문이더라구요.


중학생때부터 중요한 내용은 빨강색이 아니라 항상 파랑색으로 필기하곤 했습니다.


적녹색약으로 사는게 어릴때는 크게 불편하진 않았습니다. 어찌되었건 제가 사는 세상에서는 제가 보이는 대로 봐도 큰 문제는 없으니까요. 뭐 빨간펜 안쓴다고 세상이 달라지는건 없고, 색약검사 이미지에서 숫자 골라내지 못한다고 인생이 망하는 것도 아니며, 진로 몇가지 정도만 제한될 뿐인지라 (어렸을때는 파일럿을 꿈꿨지만 색약자는 문턱도 두드리지 못하더라구요) 크게 상관하지 않고, 제 눈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찌되었건 친구들과 '넌 이렇게 보이니 난 이렇게 보임' 하는 이야기 외에는 큰 문제를 느끼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커가면서 전자기기를 사용하게 되고, 신호등이나 조명장치가 단순한 '전구'에서 'LED'로 넘어가는 추세가 되며 조금씩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 전등식 신호등일때는 교통신호 구분도 문제가 없었지만 이게 LED로 교체되면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이 분(외부 링크)의 상황과 비슷한 생황이죠. 3색 LED 불빛을 보면 그냥 노랑색과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색이 나타납니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파악한 색상은 적색 비스무리한 무언가, 흰색 비슷한 무언가였습니다. LED파장에 따라 색을 구분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달라지기 때문에 상당히 신경이 많이 쓰였습니다. 공돌이인지라 기판을 만질때 저항의 4색띠중에 주황색과 녹색의 구분이 안되는지라 납땜을 잘못한 경험도 있네요. 지도를 볼 때도 색상이 서로 비슷한 색상이 인접해있으면 구분선을 기준으로 두 색이 똑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이정도쯤이야 익숙해지면 그만인지라 친구들은 심각하다고 했지만 정작 저는 한번도 심각하게 받아들여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고, 보정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사진이 주는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블로그에 사진을 올리려면 보정 작업을 거쳐야 했는데, 사진을 보정할때는 밝기, 명료도 뿐만 아니라 가끔 색상을 조정해야 할 일들이 생긴다는 점입니다. 기본적인 옵션을 조정할때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사진의 전체적인 색상을 조절해야하는 때는 제가 색상 구분이 안되다보니 어디를 레퍼런스로 잡고 보정을 해야할 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색온도를 조정하거나, 색조를 조정하더나, Advanced 항목에서각 색상별로 채도와 광도를 조절할 일이 생기면 그야말로 당황스러운 사태가 연출됩니다. 사진을 찍을 수나 있는걸까, 색약이 사진 보정하는게 가당키나 한건가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사진 한장을 보정하려면 당장 색온도 맞추고, 화이트밸런스 잡고, 색상 밸런스 확인하는데만 몇십분씩 걸리고, 그렇게 힘들게 나름대로 밸런스를 잡아도 제 눈은 정상인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이게 밸런스가 맞은건지 아닌지 확인을 할 수가 없습니다. 



방법이야 뭐 별 수 있나요. 색온도, 채도, 활기를 각각 1% 단위로 조절해가며 수없이 스크린샷을 찍어 넘겨가며 사진을 비교했습니다. 어떤 사진이 어떤 결과물을 내는지, 어떤 옵션으로 조정해야 가장 정확한 색을 표현할 수 있는지 직접 눈으로 비교해보는 방법밖에는 없었습니다. 원시적인 방법일 수 있겠지만 이렇게 샘플을 많이 만들어서 직접 비교해보고, 색상피커로 색상을 집어서 인터넷을 통해 실제 색상값과 비교를 해보고, 블로그 멤버들에게 보정된 값의 사진을 보내 어떤 사진이 제일 자연스러운 색상을 가지고 있는지 물어보면서 나름대로의 색상 가이드라인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정량화된 수치를 통해 색상을 익히는 것인지라, 색상코드를 통해 색을 보고 익히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일 것 같았습니다. 결국에는 신체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노력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저는 정확하게 밸런스를 맞춰 보정할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을 찍을때 운이 좀 따라줘야겠지만, 최대한 보정이 필요없을 사진을 찍는 것이 앞으로 목표입니다. 물론 계속해서 사진보정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노력해나가겠지만 밸런스를 맞춰 보정하려면 아직까진 절대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고, 제대로 사진을 보려면 비싼 색약 전용 모니터가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만약 이러한 제 노력이 실패로 끝나게 되더라도, 적녹색약이 바라보는 세상이 밸런스가 이렇게 깨져 보이고, 제가 여러분이 보는 그 정열적인 색상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제 사진으로 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마지막으로, 핸디캡을 가지고 근무하고 계실 세상의 많은 어른들, 신체적인 핸디캡으로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계실 친구들에게 응원의 말 한마디 남기면서 글 마무리하겠습니다.